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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년만에 다시 찾아왔..
by shiny at 08/08 정말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by 가슴시린 at 04/13 이 책은 요즘 많이 출판된.. by 문유 at 03/12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by 문유 at 01/09 제가 고마워요. :-) 플.. by 문유 at 01/05 |
실제로 그녀가 남긴 작품들을 보아도 실비아 플라스는 이런 삶의 경험들을 게걸스럽게 수집해 문학으로 다듬는 데 목숨을 지탱하는 최후의 에너지까지 쏟아 부은 느낌을 준다. 아니, 심지어 독자로 하여금 문학을 완성하기 위해 극적인 경험을 수집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자전적 작가였고, 결벽증처럼 집요하게 자신의 삶을 문학의 소재로 파헤쳤다. 그 결과 유명한 일기는 물론이고, 로버트 로웰의 고백시 전통을 계승했다는 평을 듣는 시들도, 나아가 심지어 유일한 소설인 [벨 자]까지도 속속들이 자서전적인 설정과 감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삶이란 오로지 그녀 자신의 언어와 의식을 통해 투영된 상(像)이라는 점이다. 문학적 페르소나는, 방탕한 유혹녀가 되었다가, 순진한 소녀가 되었다가, 우등생이 되었다가, 파티걸이 되었다가, 타인과 외부 세계를 향한 폭력성을 보여주다가, 내면적 자기 파괴 충동을 보이다가, 끊어질 듯 팽팽한 신경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같기도 한, 그야말로 무수한 자아를 마치 옷가지처럼 바꿔 입어 가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유동적인 자아상이다. 조울증의 증후인지, 일기 속에서마저 수많은 가면들을 바꿔 쓰듯 기묘하게 작위적인 자아 인식을 드러내기 일쑤다. 그렇지만 이기심과 허영까지를 포괄한 불안한 자아의 유동성을 이처럼 실감 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작가로서 그녀의 찬탄할 만한 정직함 덕분이다. 적어도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정직하다.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아에게도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독설과 냉소를 던질 줄 안다. 치졸한 생활인의 욕망도 드러나고, 코를 파고 질투하고 허영에 들뜨는 인간성의 약하고 추한 측면들도 스스로 가감 없이 인정하고 기록한다. 나아가 병든 의식으로 자아의 기틀이 붕괴하는 순간에도, 그 의식의 병증이 움직이는 흐름을 기록해내는 힘을 발휘한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남편인 테드 휴즈가 일기의 서언에서 쓴 표현을 빌자면, 그녀의 삶/문학은 마치 무수한 거짓 가면들로 점철된 삶 속에서 침묵하던 참된 자아가 느닷없이 백열처럼 타오르며 언어를 찾아 말하는, ‘눈부신 사건’처럼 느껴진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적이고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비루한 생활의 흔적들을 모조리 감싸, 순연한 신화로 승화시키는 것은 바로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 존재의 욕망이다. 플라스의 삶/문학은 바로 “시”를 쓰고 싶다는 단 한 가지 갈망으로 하얗게 연소한다. 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완성하고, 명성과 불멸을 성취하고 싶다는 절대적인 욕망. 이 욕망 이외의 모든 것이, 생활과 사랑과 행복마저도,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이 욕망의 절대성과 숭고함이 실비아 플라스를 범속한 인간들과 영원히 갈라놓았다. 때문에 바로 이 절대적 욕망의 좌절은, 욕망이 존재의 본성과 직결된 만큼 곧장 죽음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실비아 플라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시대에 태어난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여성주의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 보수적인 가정 담론이 미국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1950년대를 살았던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으로서 독립적인 자아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규준과 걸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끊임없이 절망했다. 그리고 멋진 남자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갈망과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당대의 미국 사회 풍토에서는 양립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지만 양립 불가능한 욕망들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하고, 여성으로서도 시인으로서도 끝내 타협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스가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드러낸 감정은 지독한 애증이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속속들이 내면화했던 증후가 작품 세계 곳곳에서 드러난다. 내면화된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시인으로서의 본성이 자아표현을 하려는 참된 자아의 싸움은 불가피한 자기 파괴로 치달은 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플라스를 읽는 시각은, 그녀를 순교자나 희생자로 신화화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절망과 고독은 저항하는 자의 낙인 [벨 자] [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다. 자살 한 달 전인 1963년 1월에 플라스는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벨 자]를 처음 출간했다. 이 소설 역시 삶을 기록하려는 플라스 문학의 자서전적 경향에서 탈피하지 않는다. [벨 자]는 ‘로망 아 클레프(Roman a cléf)’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프랑스어로 ‘단서가 있는 문학’이라는 뜻의 이 장르는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다루고 실존인물들을 가명을 써서 등장시키는 픽션과 넌픽션의 중간 장르다. 소설의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이, 뉴욕의 [마드모아젤] 지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하버드 서머스쿨에서 프랭크 오코너의 작문강좌를 수강하는 데 실패한 후 극심한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가 수면제 자살을 시도한 바 있는 실비아 플라스 자신의 삶의 궤적과 꼭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버디 윌라드와 스키장 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연인인 딕과 함께 사라낙에 가서 다리를 부러뜨렸던 사건의 재현으로 여겨지며, 후원자인 작가 필로메나 기니는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와 병치된다. 친절한 여의사 닥터 놀란은 정신과 주치의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닥터 루스 보이셔와 겹친다. 그리고 [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에서 소실되어 있는 2년의 기록, 즉 최초의 우울증 발병과 자살 시도 이후 전기충격과 인슐린 요법으로 회복하는 기간의 내용을 보충하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의 가공을 거쳤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실존인물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 순전한 창작으로 가필한 부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정신병 병동과 치료 과정에는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기를 다룬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벨 자]의 몇 가지 핵심적 유사점은 - 사실관계 자체는 물론 주된 관심사와 상징, 정서의 유사점에서도 -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마드모아젤]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시기에 유일하다시피 남아 있는 일기는, 당시 소련에 원자기술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로젠버그 부부의 전기처형에 대한 미국 대중의 심드렁한 도덕적 무감에 대한 플라스의 경악과 공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벨 자]에서도, 주인공인 에스더 그린우드가 사회의 주된 정서, 주된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물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로젠버그 부부 사건은, 미국 역사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합리적 공포감이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과 법치의 영역을 넘어선 마녀사냥으로 번진 경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로젠버그 부부의 ‘전기 처형’은, 사회의 지배적 규준과 다른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에스더 그린우드가 훗날 겪게 되는 - 그리고 실제로 당시 정신병 치료에 광범하게 도입되었던 - 전기 충격 요법과 이어진다. 차마 “다른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획일적 사회의 폭압이, 그 어떤 인습의 구속도 받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되고 싶었던 에스더 그린우드의 자유로운 영혼을 유리 뚜껑(벨 자)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처럼 소설을 시작하는 로젠버그 부부의 언급은 에스더 그린우드의 자기파괴 충동을, 매카시즘이 횡행하고 극도의 보수적 가정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던 1950년대 미국이라는 현실적 맥락에 자리 잡게 한다.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관용이 집단 광기에 준하는 비합리로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기다. 절망의 깊이는 억압의 중압에 비례하는 법이니, 우리는 실비아 플라스의 문학을 통해 한 인간을 넘어 시대를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한다. [벨 자]에 드러나는 실비아 플라스의 여성주의도 이 같은 맥락에서 조명해야 할 터이다. 순결과 여성의 몸에 대한 에스더 그린우드의 혼란된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특히 모성은 여성을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동물적 종족 번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굴레로서, 공포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듯하다. 시인의 재능을 가진 딸에게 타자와 속기를 배워 비서가 되기를 원하는 어머니나 완벽한 중산층 주부인 버디 윌러드의 어머니 역시 체제에 길들여진 딱한 군상일 뿐 에스더의 역할 모델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결국 에스더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모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몰이해와 남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의 체제적 이기심이다. 그녀는 성(性)의 본질 그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참된 소통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성적 관계의 공허함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폭압적 불관용으로, 안전한 범주 속에 가둬 길들이려고 하는 세계 속에서, 에스더 그린우드의 시성(詩性)은 그 자체가 저항이 된다. 에스더 그린우드가 빠져 들어가는 절망과 환멸의 병증은 그 자체가 안온하게 체제에 안주하지 못하고 영원히 꿈꾸며 저항하는 자의 낙인으로 읽힌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 에스더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끝없이 소통의 시도를 하지만, 계속해서 낙담한다. 비인간적인 치료의 과정 속에서도 파멸하지 않고 버텨낸다. 이 소설에서 에스더 그린우드가 퇴원하고 세상에 적응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엠마와 달리 - 그리고 플라스와 달리 - 그녀가 끝끝내 살아남았고, 살아남아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에스더는 절망과 고독의 한가운데서 죽음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려 투쟁하며, 그 투쟁은 영웅적이다. 플라스의 자살이라는 종지부로, 인간답게 실존하기 위한 부단한 투쟁의 가치까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벨 자]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문학을 오로지 죽음의 무도로만 보지 않고, 삶에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끝까지 부여하려 했던 한 시인의 치열한 실존의 꿈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준다. |